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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산책길

바람구두 2015-03-12 18:56:24 469

우리 회사 위치가 참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울역 노숙인들을 매우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이라든가 주변에 특출한 맛집이 없다는 점, 혹은 

주택가가 근처에 있어 멋스러운 도시인의 감성을 느낄 수 없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위치가 불만스러울 수도 있지만, 한 걸음만 나서도 재밌는 산책길이 펼쳐진다는 것 만으로도

앞의 모든 불만이 매우 사소한 불평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회사앞에서 유플러스 건물을 따라 걷다가 트라팰리스 건물을 왼편에 끼고 힐튼 정문까지 올라 봅니다. 

힐튼 앞 횡단보도를 건너면 큰 은행나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을이면 무수한 은행을 맺곤 해서

항상 소방서 사다리차가 달려와 은행을 털어내는 나무입니다. 

나무 오른쪽에 굴국밥집도 보이고 엉클조 맥주집도 있습니다. 


남산 도서관을 향해 소월길을 따라 걸으면 오른쪽에 재밌는 건물들이 나타납니다. 

주택 이층에 점집도 보이고, 남산 브랜드하우스라는 예쁜 건물의 회사도 있네요. 

주유소 양 옆으로 지금은 문을 닫은 샤야99와 나오스노바가 눈에 띕니다. 

샤야 99는 탤런트 김호진씨가 요리도 직접 하면서 운영했던 곳인데 불고기 퀘사디아랑 새우 수제비가

특히 입맛에 잘 맞았던 곳입니다. 식사 후 그냥 일어섰더니 커피 마시고 가라며 강요하던!? 김호진 씨가 

생각이 나네요. 샤야는 김호진씨와 김지호씨 딸 영어이름이랍니다. 아마도 99년 생인 것 같아요. 

나오스 노바는 모든 메뉴가 제법 비싼 프렌치 레스토랑인데, 그 멋스런 외관과 인테리어 덕분인지는 몰라도

TV나 잡지에 꽤 자주 나오던 곳입니다. 인테리어가 너무 멋스러워 화장실에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을씨년스럽게 RENT라는 A4지가 창문에 붙어있습니다. 


두 곳의 문 닫은 멋스런 레스토랑과는 반대로 새로 문을 연 가게도 있습니다. 

우연수집이라는 소품 가게인데요, 1호점은 서촌에 있었는데 인기가 꽤 있는지 남산점도 생겼습니다. 

손으로 만든 엽서, 각양각색의 카드 수집품, 라마 인형, 벽걸이 시계 등 하나 밖에 없는 수공업 제품을

원하시는 분이라면 가볼 만한 곳입니다. 여자분들이 주요 고객층이다 보니 가게 문을 나설 때, '다음에 여자친구랑

꼭 같이 오세요' 라고 합니다.

우연수집이 처음에는 우연수라는 사람의 집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우연을 수집한다는 의미였네요. 


이런 저런 구경을 하며 걷다보면 어느 덧 용산 도서관과 남산 도서관을 가르는 갈림길에 도착합니다. 

용산 도서관 정문을 향해 가다 도서관 앞 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시는 것도 좋고, 남산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한권 빌려오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짧은 생각을 해봅니다. 주변에 노숙인을 항상 볼 수 있다는 것, 맛집이 없다는 것, 

멋진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노숙인을 항상 볼 수 있어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항상 잊지 않을 수 있는 것, 맛집이 없어서 주책스럽게

입맛만 올라가지 않는 것, 멋진 도시 건물들이 없어서 더 넓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 정말 좋지 않은가 하구요.